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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리 : 잊혀진 영웅들(Battle of Jangsari, 2019) by yacho44

과장된 영화 내용의 오해와 진실

 동영상보기==>http://silvernettv.com/17280

 

장사 상륙작전은 지금 80대 중반 실버들이 6·25동란 때 학도병으로 참전한 전투이다.


 이 영화를 통해 70년 전의 한국전쟁을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나라가 1945년 해방이 되고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軍政)이 시작된다.


그러나 미·소 양쪽 진영의 대립으로 남한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싸움이 치열했다.

    

특히 중학교(당시 5년제) 학생들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선생님들의 사주(使嗾)좌익학교우익학교로 나뉘어 싸웠다.


서울에서는 광복절 등 국경일에도 우익학교들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학교들은 장충단공원에서 따로따로 기념식을 하였고 따로 시가행진을 하다가 을지로에서 만나 패싸움을 벌였다.

 

그뿐 아니라 골목길을 가다가도 좌익학교 학생과 우익학교 학생들이 만나면 패싸움을 벌여 피 터지게 싸웠다.

학생들뿐 아니라 정치인들도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서로 싸움만 하고 이권 다툼에 몰두하였다.

북한이 전쟁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남한의 지도자들은 설마 전쟁이 일어나겠느냐며 안이한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1950년 북한군은 소련제 탱크와 기관총(따발총) 등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기습적으로 남한을 공격하였다

. 북한군은 하루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2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그동안 서울과 중부지방의 좌익학교 학생들과 멋모르는 젊은이들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되어 어제까지의 이웃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한편 우익학교 학생들은 빠르게 후퇴하는 남한 군인들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산속에 숨어 도피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9·28 서울 수복 때 국군병영을 찾아가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다.

 

그러나 남쪽의 우익학교 학생들은 낙동강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고 유엔군이 참전할 즈음에 대거(大擧)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였다.


특히 대구와 경상도 지방의 학생들은 가족을 지키자는 차원에서 낙동강을 사수하는 전투대열에 단체로 입대하였다.

 

그중에서도 학도병 500명이 참전한 다부동전투를 비롯하여 안강전투 영천 포항여중전투 칠곡 낙동강전투 마산 왜관전투 화개전투 장사전투 등지에서 목숨을 내놓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중에는 외국에서 귀국하여 참전한 학생들도 있었다.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인 장사상륙작전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718명의 학도병을 포함 786명이 참전하였다. 이 영화에서는 식량보급이 끊겼다거나 북한군 2개 연대가 퇴로를 막아 거의 전멸하였다는 등 미군의 이기주의와 군 수뇌부의 무관심을 은근히 과대 포장하고 있다는 네티즌의 평도 있다.


군의 공식 기록에는 전사 139, 부상 92, 적의 포로 40여 명의 손실이다.

 

이 영화는 925일에 개봉하여, 한 달이 넘었지만, 누적 관객 수 130만 명에 머물고 있다.


그만큼 6·25동란(同亂)을 기억하는 젊은이들이 드문 것 같다.


그러나 또다시 이러한 전쟁을 막기 위해서라도 좌파와 우파의 싸움을 그치고 북한에 상응하는 최첨단 군사력을 키워야 한다는 평도 많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서도 양쪽 진영(陣營)의 전력(戰力)이 대등할 때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덧글

  • virustotal 2019/10/29 23:43 # 답글

    공명 선생의 병법을 수천년넘게 옆에서 이용하니

    그건 그렇고 그게 직빵이죠

    미국도 6부족 인디언 연합회인가 있었는데

    차라리 토사구팽으로 당한다고 해도 한곳에 제대로 지분과 세력을 잡으면 그나마

    그래 그게 바로 자치주죠

    조선족 자치주가 거지같지만 중앙청에 인공기달고 제대로 중공에 충성했으니 뭐라도 물론

    다른경우라고 해도

    스스로 분열하면 그꼴난다는겁니다.

    아무튼

    미국의 경우 6부족 분열이 인디언 역사에 치명타라는건 반박할수없죠


    미국 독립 전쟁
    미국 독립 전쟁은 기본적으로 두 개의 평행한 전선이 있었다. 하나는 동부의 영국 지배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서부의 인디언 전쟁이었다. 신생국가인 미국은 미시시피 강 동쪽에 있는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인디언과 싸우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서부로 정착지를 확장하려는 식민지와 인디언 사이에 평화를 유지하는 정책을 채택했기 때문에 독립 전쟁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영국 편에 섰던 인디언은 자신들의 영토로 침범하는 이주민들을 영국 정부가 막아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독립 전쟁의 서부 전선은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파괴적인’ 인디언 전쟁이 되었다.

    일부 인디언 사회에서는 이 전쟁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하는 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렸다. 뉴욕과 펜실바니아에 기반을 둔 이로쿼이 연방은 독립 전쟁에서 내란 상태가 되었다. 여섯 개의 네이션으로 분열되어 오네이다족과 투스카로라족은 반군 편을 들었고, 모호크족과 세네카족, 카유가족, 그리고 오논다가족은 영국 편을 들어 싸웠다. 비록 이로쿼이 족이 서로에 대한 직접적인 충돌은 피했지만, 독립 전쟁을 이로쿼이족의 내전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양측 모두 새로운 정치적 분열로 인해 영토를 상실하게 되었다. 남동쪽에서는 체로키 족이 중립파 (또는 미합중국파)와 친영국파로 분열되었고, 미국파는 드래깅 카누가 이끄는 치카모가 족이었다. 다른 여러 부족 사회도 유사한 분열 상태에 빠졌다.

    이 전쟁 기간에 개척민과 원주민 민간인들은 모두 상당한 고통을 겪었으며, 식량은 빈번한 원정대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러한 원정대 중 가장 최대 규모는 1799년의 설리번 원정대로 40개 이상의 이로쿼이족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1783년 영국이 미합중국과 〈파리 조약〉을 맺고 휴전을 하면서, 인디언들은 자신들에게는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광대한 인디언 영토를 미국에 할양했다는 사실을 알고 경악했다. 미합중국은 당초 영국 편을 든 인디언을 땅을 잃은 적으로, 피정복민으로 취급했다. 미합중국 연방 정부는 영토의 확장을 원했고, 이것을 인디언으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고, 전쟁을 통해 목적을 이루려 했다.

    https://ko.wikipedia.org/wiki/미국_인디언_전쟁


    미국의 역사를 보면 제대로 나오지만

    이때 제대로 하나의 세력이 되서 뉴질랜드 아니면 다른 지역처럼 자치를 하고 했어야 하는데

    지들의 의견을 하나로 못만들고 하니 망하죠

    우리 고려의 경우

    쿠빌라이 칸

    ox퀴즈에서 쿠빌라이 칸을 전부 몰아넣기 해서

    그나마 되었는데

    미국의 경우 6부족이 영국편 중립 미국편 이꼴이니

    https://pgr21.com/freedom/78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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