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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은 참혹했습니다. by yacho44

오늘은 6.25전쟁이 일어난 날인데..  요즘.. 6.25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특히 젊은이, 어린이들은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라네요.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남북전쟁 기념일에는 온 국민이 당시의 전쟁놀이 행사에 참가하여 전쟁의 참상을 경험함으로써 다시는 동족끼리 싸우는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다짐한다는데..


미국의 마거릿 미첼 여사도 미국 남북전쟁을 소재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을, 전쟁이 끝난 지 70년 만에 썼다고 합니다.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그녀가 당시 상황을 실감 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수시로 들려주었던 전쟁이야기 덕분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6.25전쟁 기념식도 없고, 전쟁이야기를 해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 동네 이장님은 6.25날 만 되면 우리 아파트 정자(亭子)에 앉아 해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젊은이는 없습니다. 이제 그분의 연세가 85세니 얼마나 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장님이 들려준 경험담을 아무런 가감 없이 그대로 적어 볼까 합니다.


ㅡ63년전 그때 나는 중학교 5학년이였어.. 6.25전쟁이 일어나던 일요일 날 아침 나는 서울운동장에서 축구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는데..

축구 전반전이 시작되고 아침 한 10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축구장으로 헌병 백차가 들어오더니 메가폰을 관중석으로 들이대고 소리소리 지르며 말하기를..


  -외출 중인 국군 장병은 지금 즉시 원대복귀하라..!!-

  -다시 한 번 말한다. 휴가 중이거나 외출중인 국군장병들은 지금 즉시 귀대하라..!!-


 ㅡ그래서 나는 군부대에서 무슨 비상훈련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했더랬지.. 아- 그랬더니 글쌔.. 관람석에 있던 사람들이 조금씩 웅성거리며 한두 명씩 축구장을 빠져나가는 거야.. 급기야는 사람들이 점점 더 시끄러워지더니 모두 급히 축구장을 떠나는 거 아니겠어..?

 물론 축구경기도 중단이 되고 나도 서둘러 하숙집으로 가는데.. 버스가 안 다니더라구.. 아니 버스란 버스는 모두 무슨 깃발을 달고 군인들을 싣고 전방 쪽으로 가더라고.. 그리고 짐보따리를 이고 진 피난민들이 미아리 쪽에서 물밀 듯시 한강 쪽으로 밀려가더라니까..

나도 피난을 가든지 집으로 가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하숙집으로 갔더니 하숙집에 같이 있던 친구가 월요일날 학교에를 일단 가보고 나서 결정을 하자고 하여 우리는 월요일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어..

 ㅡ그런데.. 밖에를 나올 수가 없는 거야.. 벌써 좌파 게릴라들이 골목 골목을 장악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거야.. 그때는, 6월 25일 전에도 좌익학생들과 우익학생들의 패싸움이 극심했었어.. 좌익학교와 우익학교의 싸움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아..

 

우리는 나이가 17,8세 밖에 안되니까.. 우익이 뭔지, 좌익이 뭔지 잘 몰랐지, 그냥 선배들과 선생님들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을 뿐이라니까..

 

그때는 국경일 기념식도 우익학교들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학교 학생들은 장충단 공원에서 따로따로 했고 시가행진을 하다가 양 진영이 을지로에서 만나면 패싸움을 벌이곤 했었지..

 

ㅡ좌우간 월요일 26일날 좌익학생들을 피해서 차도 안 다니는 길을 1시간쯤 걸어서 학교에 가니, 아무도 없고 임시휴교한다고 써 붙여 놓았더라고 ..우리는 할 수 없이 위험한 길을 요리조리 피해서 하숙집으로 다시 오니 벌써 저녁때가 다 되었더라구..

 

우리는 다음날까지 밖에도 못 나가고 하숙집에 숨어 있었는데.. 27일에는 벌써 북한 인민군들이 가끔씩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것이 보이는 거야..

 

ㅡ우리는 좀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고향 집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한강 쪽으로 갔는데 말야.. 그때 하숙집이 신당동이었으니까. 뚝섬 쪽으로 가면 나룻배라도 있으려니 하고 갔는데 배라는 배는 모두 한강 남쪽으로 가서 있고 건너갈 배가 없더라니까..??

  

그때 우리 집은 인천이었는데.. 하는 수없이 한강다리를 건너기로하고 밤새도록 북한 정규군과 빨치산(바닥빨갱이)들의 검문을 피해 용산에 도착하니 28일 새벽녘이었고 피난민들은 아수라장이 되어 한강다리가 끊겨 버렸다는 거야..

 

ㅡ그때는 좌익학교라도 다닐 걸 괜히 우익학교에 다녀서 고생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니까..? 그때 빨갱이들한테 잡히면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더라구..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강 하류 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성산대교가 있는 염창나루까지 와서 수영으로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지..

 

수영으로 한강을 건너는데.. 시체들이 수도 없이 떠내려오더라구.. 하나같이 모두 물먹은 하마같이 배불뚝이가 되어서..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서 한강을 건넜어.. 빤쓰만 입고 덧옷은 머리에 매어 달고 출발했는데 덧옷은 모두 물에 떠내려갔어.. 그래도 살아서 한강을 건넌 것만도 고마웠었지..

 

ㅡ우리는 그렇게 또 하루 종일 걸어서 인천까지 갔다니까..? 집에 와서 며칠만 있으면 전쟁이 끝날 줄 알았었지, 그때는.. 아 그랬더니 그게 아니고 며칠 지나니까 공산군이 완전히 인천까지 점령을 해버리고 바닥 빨갱이들을 앞세워서는 군경집안 사람들, 우익운동하던 학생들을 잡으러 다닌다는거야..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이웃끼리 정답게 오순도순 살던 동네였는데.. 좌익이 뭔지, 우익이 뭔지 알지도 못하는 시골 사람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총부리를 들이대고 잡으러 다니는 거였지..

 ㅡ그래서 거기 있다가는 잡혀 죽을것 같아 밤중에 몰래 친척집으로 피신하여 다락에 숨어 있었다니까.. 9월 28일까지.. 9.28 수복때 유엔군이 들어오고 우리는 학도병으로 군에 입대하였는데.. 그게 오히려 안전할 것 같드라구.. 도망 다니는 것 보다..


 그러나 전쟁은 장난이 아니더라구.. 전우가 옆에서 총 맞아 죽어갈 때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고, 총알 속을 뛰어갈 때는 총알이 사람을 피해 가더라니까?


 ㅡ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는데 3년여 동안 전장(戰場)을 누볐으면서도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 걸 보면 조상이 도왔다는 생각만 들어.. 먼저 간 전우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구..

 

또다시 그런 전쟁이 일어나면 안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돼.. 그때는 잘 몰랐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은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하다고들 그러더라구.. 6.25때도 남한이 엄청 약했었다고 그러더라구. 그래서 남침을 한 거라구..

 

그러니 전쟁을 막으려면 남한이 강해져야 해.. 잘살아야 한다는 말이지.. 국력도 키우고.. 군사력도 이북보다 강해야지.. 그래야 북한이 또 남침할 생각을 못하겠지.. 그쪽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정통파 공산주의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통치를 하고 있으니까 말야..

 

그때 사람들 엄청나게 많이 죽고 다치고 그랬어.. 피아(彼我)간에 군인과 민간인 모두 합쳐서 4백5십만 명이 넘는다고 그러더라구.. 물론 생산시설, 공공건물, 학교, 주택 거의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그때 사람들.. 굶는 걸, 밥 먹듯이 했어.. 그럴 수밖에 없었잖아..?? - 끝 -


덧글

  • 흑범 2016/11/16 08:37 # 답글

    하지만 신분제도와 호적들이 와르르 붕괴되는 순효과도 있었지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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