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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白冶), 가산(家産)을 모두 가신(家臣)들에게 나누어주다. by yacho44

요즘 우리 사회의 일부 고위층 인사들은 부정하게 가산(家産)을 축적하려 자존심도 명예도 양심도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백야 김좌진 장군은 15세 때(1904년), 가신(家臣) 30여 명의 ‘종 문서’를 불태우고 그들에게 논밭을 나누어 주었다. 또 18세 때는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신학문(新學問)을 교육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맹성이 뛰어났다.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한차례 옥고(獄苦)를 치른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 무장 투쟁에 앞장선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논리에 휘말려 1930년 좌파의 하수인 박상실(朴尙實)에 의해 암살되었다. 장군의 나이 41세였다.

그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었을까. 그의 아들 김두한(金斗漢)은 미군정과 자유당 때 좌익분자들을 색출하는 데 앞장선다. 그러나 이제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 논쟁에서 자유로워질 때도 되어서 인지는 몰라도 그의 외 증손자 송일국은 정치와 무관한 배우로서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역사 대장정’ 대학생 참가자들을 이끌고 매년 만주 전적지를 방문하고 있다.

혹자는 족보에도 없는 외 증손자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지만 이제 조선시대 식 족보의 개념도 바뀌어야 할 때가 왔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족계획’을 실시한 이래 한 자녀, 두 자녀를 둔 가정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딸만 있는 가정에서는 서구식(西歐式)족보에로의 혁신이 절실한 때이다. 선구자 백야가 신학문을 교육하였듯이.

만주의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항일투사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生家址)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다. 이곳에는 생가 외에 백야 기념관, 사당, 홍살문, 기념비 등이 있다.

홍성군은 이곳에 백야공원을 조성하여 장군의 일대기를 단계별로 기술한 안내판과 조각상을 만들어 놓아 사람들이 산책하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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